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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진 ‘Forest Nowhere’ 갤러리'도스' 기획전
임예진 ‘Forest Nowhere’ 갤러리'도스' 기획전
  • 김영광 기자
  • 승인 2020.12.02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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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9 (수) ~ 2020. 12. 15 (화)
갤러리'도스'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7길 37

[뉴스플릭스] 김영광 기자 = 사람에게 인상 깊은 체험은 기억으로 복제된다.

당시의 광경과 세세한 요소를 정확히 재현할 수는 없지만 흐릿함이라고 부르는 생각에 자욱한 안개는 과거의 장면의 일부를 미세하게  지우거나 왜곡한다.

지난 꿈처럼 멀리서는 뚜렷하지만 다가가 자세히 보려하면 잊혀지듯 희미해진다. 가슴속 어딘가에 분명한 존재감을 지니며 자리하고 있지만 글과 그림으로 새겨보기에는 막연한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 그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 비로소 깊숙이 품고 있던 향기를 터트리며 우리를 감상으로 적신다.

푸른 산, 50 x 72.7cm, acrylic on panel, 2020

임예진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는 산의 풍경을 그린다. 특별한 목적이 없었기에 자유로웠던 지난날의 발걸음과 시선은 이마에 흐르는 작은 땀과 폐를 채우는 잎사귀의 썩고 싹트는 냄새를 아랑곳 않고 품었다.

숲의 그림자를 기울이는 해의 이동은 자신과 주변 세상의 수명을 소모하는 섭리가 아닌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호였다. 성인이 되어 찾은 숲은 기억 속에 멈추어진 화면을 여전히 닮아있다.

생물의 사소한 손길은 시선을 집중해야 비로소 보이는 차이를 남겼지만 저 멀리 보이고 저곳에서 보일 이곳의 거대하고 우직한 균형에 비하면 하찮은 변화였다. 길고 느린 자연의 시간을 흉내 내듯 작가는 롤러를 굴려 화면을 채워나갔다.

롤러는 단순하고 넓은 면적을 칠하기에 적합한 도구 이지만 좁은 틈을 빼곡하고 빈틈없이 그리려면 작은 손길이 필요하다.

Untitled_ 1, 60.6 x 90.9cm, acrylic on panel, 2018

평평한 나무판은 매끄러운 표면을 지닌 듯 보이기에 자칫하면 간편하게 여겨지기 쉽지만 물감이 칠해진 롤러를 팔이 아프도록 오래 휘둘러야 깊게 엉겨 붙을 만큼의 친절만 베푼다. 능선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산의 피부를 무심하게 스치듯 작가는 어깨를 크게 움직이며 하늘을 칠하고 산을 채운다.

자연풍경을 그리기위한 반복적인 움직임은 역설적이게도 기계적이기도 하지만 숨이 차오르게 하고 근육에 가벼운 통증을 유발하는 제작과정은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오르는 아이의 발걸음처럼 생물이 지닌 무아지경이다.

그리고 그 틈에 손으로 어루만져 생긴 작은 변화들이 무리지어 있다. 산과 숲이라는 짧고 큰 이름에 뭉뚱그려진 작은 식물과 동물을 품은 먼지는 거대한 나무와 바위 사이에서 저마다 다른 속도와 시간을 지니고 미묘한 얼룩처럼 스며들어 있다.

화차, 65.1 x 100cm, acrylic on panel, 2020

붓의 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손끝에서 비벼진 물감은 앞서 이야기한 작은 것들의 존재감을 희미하지만 분명히 새기고 있다. 작가가 그린 산의 모습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형상으로 그려졌지만 현실의 색이 아닌 관념의 색으로 표현되었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공간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관객의 사연이 더해지기에 어떤 작품은 밤하늘이 오기 전 해질녘의 어스름이 마지막으로 품은 뜨거운 하늘과 산 그림자의 서늘한 얼룩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전된 것처럼 보이는 색의 조합은 갑자기 눈을 감았을 때 눈꺼풀 안쪽에서 보이는 어둠속의 화려한 잔상처럼 보이기에 기억 속 풍경이라는 작가의 이야기에 몰입을 더한다.  

작가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찾은 산에서 알고 있던 모습과 잊고 있던 모습을 가림 없이 찾는다. 세월의 먼지로 인해 기억보다 흐리고 두껍게 굳어진 장소의 피부는 추억이 보장하는 환상에서 걸러진 일그러짐조차 무정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임예진의 작품은 멀리서 하염없이 도시를 둘러싼 산의 길고 느린 호흡을 가까이 들이켜 볼 수 있게 안내한다.  

작가노트

어디에도 없는 숲 _ Forest Nowhere

어린 시절 자주 갔던 시골 산, 바쁜 삶에 꽤 오랫동안 멀리했다.

어느 날, 다시 찾아보니 낯설면서도 익숙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사이 나는 많이도 변했는데 산은 너무나도 똑같거나 혹은 아주 미묘하게 변해있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의 나를 소환할 만큼 특별한 힘이 있었다. 당시의 포근한 기억이 쌉싸래한 나무의 향과 함께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나는 나만의 특별한 산의 풍경을 그린다. 변함없이 존재하는 숲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면 한없는 평안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상에 지칠 때면 종종 어린 시절의 숲을 추억하며 의지해왔다.

물론 이는 내 인식의 풍경이며 일종의 도피처이다. 즉, 과거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감정이 뒤섞여 만들어진 가상일 뿐이다. 그런데 이는 내 마음속에서 실제와 묘하게 관련을 맺으며 강력한 생명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실제로 존재하는 숲에 대입시키는 시도를 끊임없이 감행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정서가 강력하게 증폭되는 경험에 취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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