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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ney 탐구] 디즈니 왕국의 아버지, '월트 디즈니'
[Disney 탐구] 디즈니 왕국의 아버지, '월트 디즈니'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1.12.03 14: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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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플릭스] 김민수 기자 = 수많은 명작 애니메이션과 영화, 그리고 디즈니랜드와 같은 테마파크까지 전세계 문화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 '월트 디즈니'.

오로지 한 우물만 파오며 일평생을 달려온 그의 일대기를 알아보자.

 

어린 시절의 월트 디즈니

▲ 월트 디즈니
▲ 월트 디즈니

디즈니는 19091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다. 4남 1녀 중 네번째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매일 보던 신문의 카툰을 따라 그리며 그림 실력을 차츰 키워갔지만 그림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상상력이 풍부했기에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러던 중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생계를 위해 형 로이와 함께 매일 신문을 돌리며 이것저것 다양한 일을 한다. 그렇게 6년 간 생활하던 월트는 간신히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토요일마다 근처 미술학원을 다니며 그림 실력을 키워나간다.

1917년 월트는 맥킨리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교 신문지의 만화가가 되고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을 주제로 애국적인 만화를 그려내기도 했다.

당시 엄격했던 아버지와 월트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다른 형들과 마찬가지로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집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나이가 어린 관계로 해군으로부터 입대를 거절당한 그는 자신의 그림 실력을 활용하여 여권을 위조하였고 적십자사 트럭 운전수로 제 1차 세계 대전을 경험하기도 했다.

약 1년간 트럭 운전수 역할을 수행했던 디즈니는 운전하던 트럭에 그림을 그리고 군 신문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는 등 계속해서 그림 활동을 이어갔다.

 

본격적인 그림 활동

1919년 미국으로 돌아온 월트는 형 로이의 소개로 한 광고업체에 들어가게 되고 광고용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영원한 친구이자 동업자인 천재 애니메이터 '어브 아이웍스'를 만나게 된다. 월트는 이곳에서 촬영 방식을 공부하고 아이웍스와 함께 미술학원에 다니며 드로잉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1920년 회사의 경영 악화로 인해 둘은 해고당하게 되고 의기투합하여 자신들만의 회사를 차려 컷아웃 애니메이션 광고를 제작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했다. 이 시기에 영화 광고업자인 '코거'가 합류하게 된다.

월트는 종이로 캐릭터를 제작하여 움직임을 촬영하는 형태인 컷아웃 애니메이션 기법이 아닌 종이에 만화를 그려 넘기는 새로운 형태인 셀 애니메이션 기법을 시도하고 싶어하는데 여기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지 않은 코거와 마찰을 빚게 되고 1921년 월트는 회사를 떠나게 된다.

이후  ‘Newman-Laugh-O-Grams’라는 극장 홍보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되고 큰 성공을 거두게 되어  ‘Laugh-O-Grams’라는 스튜디오를 설립하게 된다. 많은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하고 '잭과 콩나무', '신데렐라' 등 단편 애니메이션들을 만들게 되지만 경영 악화로 인해 파산하게 된다.

이 시기에 월트는 어브와 헤어져 실사영화 감독이 되기 위해 할리우드로 진출했으나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형 로이와 함께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를 설립하게 된다. 이때 할리우드 최초의 여성 배급자였던 '마거릿 윈클러'에게 실사와 애니가 합성된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시리즈를 판매하게 되고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고, 아이웍스가 다시 회사에 합류하게 된다.

1925년 자신이 고용한 아티스트였던 '릴리 바운즈'와 결혼을 하게 되고 두 딸과 함께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 월트 디즈니 (사진/네이버 나무위키)
▲ 월트 디즈니 (사진/네이버 나무위키)

이후 앨리스 시리즈의 배급은 마거릿 윈클러의 남편이었던 찰스 민츠에게 넘어가게 되는데 앨리스 시리즈의 인기가 시들어가자 민츠는 디즈니에게 유니버설에 배급할 새로운 캐릭터를 요구하게 되고 이에 디즈니와 아이웍스는 '오스왈드 래빗'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게 되며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오스왈드 래빗이 큰 인기를 얻자 디즈니는 더 큰 금액의 액수를 받길 희망했으나 찰스 민츠는 오히려 돈을 깎겠다고 월트를 협박하게 된다. 게다가 민츠는 디즈니를 위해 일하던 다수의 직원을 빼돌렸고, 유니버설 픽쳐스가 오스왈드 래빗의 지적 재산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악용하게 된다.

이에 월트는 '두번 다시 딴 회사 하청은 맡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며 자신의 곁에 남은 아이웍스와 함께 새로운 캐릭터를 개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미키 마우스였다. 오스왈드를 손보아 만든 미키 마우스를 1928년 '미친 비행기'를 선보였고, 사업을 점차적으로 확장해 도날드 덕, 구피 구프 등 인기 캐릭터들을 내세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특히 세 번째 단편인 '스팀보트 윌리'는 소리가 녹음된 최초의 유성만화로서 1927년 최초로 유성영화인 '재즈싱어'가 공개되며 당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이 유성기술을 자신의 만화에 적용한 것이었고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여담으로 디즈니가 영감을 주고 아이웍스가 그려낸 귀가 짧고 둥근 쥐의 첫 이름은 '모트미어 마우스'였지만 이름이 별로라고 생각한 아내의 제안에 따라 '미키 마우스'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1930년 또 다시 수익 배분 문제로 배급업자였던 팻파워즈와 갈등을 빚게 되고 적자가 심화되며 아이웍스와도 불화가 생기게 되어 디즈니와 헤어지게 된다.

이후 배급처를 컬럼비아 픽처스로 옮기게 되고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고 시도하기를 좋아했던 디즈니는 최초의 컬러 애니메이션인 '꽃과 나무'를 만들게 된다. 로이는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제작을 반대했지만 놀라운 사실성으로 상업과 비평적으로 큰 흥행을 거두게 되며, 디즈니는 1932년 처음 생긴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첫 수상을 하는 쾌거를 달성하게 된다. 월트는 이후 같은 부문에서 8년 연속 수상을 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전성기를 열게 된다.

1933년 '아기돼지 3형제'를 제작하게 되어 크게 성공을 하고 스튜디오도 점차 확장하기 시작한다.

1934년에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풀컬러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제작을 결심하게 되고 제작에만 4년의 시간을 소요하게 된다. 제작 당시 첫 예산의 3배인 150만 불이 들어가 큰 빚을 지기도 하지만 끝내 작품을 완성하게 되고 백설공주는 1938년 가장 성공한 영화가 되며 이듬해까지 650만 불을 거둬들이는 큰 성공을 맛보게 된다.

1940년 아이웍스가 다시 합류하게 된다. 이 당시는 전쟁으로 인해 수입이 급감하게 되는 위기를 맞은 때였다. '피노키아 판타지아'를 선보여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금전적으로는 큰 손해를 보았으며 지속된 불황으로 인해 직원들의 임금 감촉이 감행됐다. 이 과정에서 디즈니의 독재적인 성격과 처리방식이 문제가 되어 5주간 애니메이터들의 파업이 지속되기도 했으며, 몇몇의 애니메이터는 디즈니를 떠나기도 했다.

이후 월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미국을 위해 홍보 및 군자금 모금용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지만 돈이 되지 않았고 1942년 발표한 '밤비' 또한 손해를 보며 1944년이 됐을 무렵 400만 달러의 빚을 지게 된다.

하지만 전쟁의 여파에서 벗어난 1950년대에는 '신데렐라'가 애니메이션으로 세상에 첫 공개가 되고 이후 '보물섬'과 같은 실사 영화를 만드는 동시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피터팬' 등의 영화를 선보이며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게 된다.

이 시기 월트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큰 간섭을 하지 않고 테마파크를 계획하게 된다. 자신의 딸들과 한 놀이공원에 놀러갔을 때 조금 더 깨끗하고 아이와 부모가 더욱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테마파크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에서 결심하게 된다.

월트는 1955년 첫번째 디즈니랜드를 오픈하게 되고 오픈 직후 디즈니랜드는 하루 2만 명 이상 방문, 첫 해에만 360만 명의 방문객을 기록하는 큰 성공을 거뒀으며, 1964년에는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합성한 영화인 '메리 포핀스'를 제작해 생애 처음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한다. 그는 '메리 포핀스'를 자신의 경력에서 최고의 업적 중 하나로 여기기도 했다.

▲ 디즈니 랜드
▲ 디즈니 랜드

이후 1965년 디즈니랜드보다 확장된 골프 코스와 리조트 호텔 등이 추가된 디즈니 월드를 만들것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정글북'을 제작하던 도중 어린 시절부터 애연가였던 그는 1966년 폐암을 진단받게 되고 그 해 12월에 6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된다.

이후 디즈니사는 부침을 겪게 되지만 1980년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고 현재는 전 세계의 문화를 아우르는 하나의 왕국으로 자리잡게 됐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꿈을 꾸라 말하는 월트 디즈니.

그가 이룩한 애니메이션 업계와 오락 산업, 문화 산업에 미친 영향력은 현재에도 방대하게 남아있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아이들에게도 동심을 심어주는 영원한 만화가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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