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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오신호의 ‘시네마 오디세이’ -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나는 집으로 간다'(2001)
[칼럼] 오신호의 ‘시네마 오디세이’ -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나는 집으로 간다'(2001)
  • 영화 칼럼니스트 오신호
  • 승인 2022.02.1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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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영화 '나는 집으로 간다' 포스터

[뉴스플릭스] 오신호 칼럼리스트 =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외젠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 ‘왕은 죽어가다’에서 죽음을 거부하는 왕이 외친다.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나는 집으로 간다>(2001)는 이렇게 연극 한 편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이 연극은 영화가 시작된 후 10분 이상 계속되는데 이를 통해 올리베이라는 이미 영화의 시작부터 연극이 공연되는 시간에 현실에서의 시간만큼의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영화는 시종일관 이러한 태도로 허구와 현실을 오가면서 갑작스럽게 개인적으로 큰 상실을 겪고 그로 인해 자신도 죽음에 가까이 다가왔음을 실감하는 한 노배우의 일상을 차분한 필치로 그려낸다. 주로 말의 성찬을 벌여왔던 올리베이라의 전작들에 비해 이 작품에서 올리베이라는 다소 말을 아끼며 좀 더 여유로운 시선으로 그렇지만 여전한 깊이를 가지고 현실과 허구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인간의 ‘늙어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연극과 삶의 관계를 끊임없이 탐구해왔던 올리베이라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영화적 장치들을 통해 연극과 삶의 유사성을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가 영화의 말미에 영화 촬영 현장을 등장시키면서 연극과 삶의 관계는 영화와 삶, 혹은 영화와 연극을 모두 포함하는 허구와 현실의 관계로 확장되고 그 속에서 영화 제작 당시 90살이 넘도록 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던 올리베이라 자신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 영화에서 올리베이라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영화배우인 미셸 피콜리를 영화의 주인공인 전설적인 연극배우 발랑스역으로 캐스팅하고 있는데 이러한 간단한 설정만 가지고도 이 영화는 허구와 현실이 기묘하게 중첩되는 중층의 구조를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미셸 피콜리는 우리가 알다시피 실제로 영화 제작 당시에 영화에서의 발랑스만큼의 나이를 먹은 전설적인 프랑스의 배으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미셸 피콜리가 연기하고 있는 발랑스는 노년에 느끼는 고독을 극중 인물에게 투영한 늙은 영화감독인 올리베이라 자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허구의 인물인 발랑스는 실존인물인 미셸 피콜리이자 올리베이라이기도 한 중층의 구조가 성립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한편으로 배우로서의 미셸 피콜리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는 유사 다큐멘터리로서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 영화 '나는 집으로 간다' 스틸_출처_네이버영화

이 영화에서 드러나고 있는 연극과 삶의 유사성은 이 영화의 주도면밀한 형식적 구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미장센은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굳이 구분하여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부터 드러나는데 이오네스코의 ‘왕은 죽어가다’에서 왕을 연기하던 발랑스는 연극을 마치고 무대 뒤로 퇴장한다. 이때 우리는 무대 뒤의 공간도 마치 방금 발랑스가 공연했던 연극의 공간의 연장인 것처럼 꾸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관람석의 위치에서 인물들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시선과 그를 여전히 ‘왕’으로 보이게 하는 인물들의 배치와 먼저 퇴장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극중 배우들의 의상 그리고 시각적인 구도를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장면에서 정서상으로도 연극과 삶은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방금 죽음을 맞이한 왕을 연기했던 발랑스는 현실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그의 아내, 딸, 사위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죽음과도 같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듣고 발랑스는 현실에서도 다시 한번 무대의 뒷문으로 퇴장한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또 다른 연극인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발랑스가 맡은 프로스페로 역도 현재의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많은 시퀀스에서 발랑스는 그가 영화와 연극과 같은 허구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을 때조차도 마치 무대와 같이 설정된 일상의 공간에서 문을 열고 등장하고 다시 문으로 퇴장하기를 반복하는데 이러한 미장센을 통해 올리베이라는 연극과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연극과 삶의 유사성은 발랑스와 그를 사모하는 젊은 여배우 실비아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왕은 죽어가다’가 공연되는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우리는 무대에서 퇴장한 뒤 무대 뒤에서 발랑스를 몰래 훔쳐보는 실비아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실비아가 발랑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랑스와 실비아의 관계는 이후에 등장하는 시퀀스들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발랑스의 매니저인 조르쥬는 카페에서 발랑스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에서 상처한 발랑스에게 여자를 사귈 것을 권유하는데 이때의 대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조르쥬가 그 여자 상대로 바로 실비아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발랑스는 이를 거절하며 조르쥬에게 유명한 첼리스트였던 노년의 카잘스가 젊은 여자와 결혼한 예를 들면서 자신은 카잘스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발랑스의 신념은 이후에 등장하는 조르쥬가 그에게 TV 출연을 제안하는 시퀀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화면 속에 실비아도 함께 등장하고 있는 그 시퀀스에서 조르쥬는 발랑스에게 액션도 있고 로맨스도 있는 TV 시리즈물에 출연할 것을 제안하는데 그 작품에서 그와 로맨스를 펼치는 상대역으로 예정되어 있는 인물이 바로 실비아이다. 이때 발랑스는 지금껏 그런 작품에는 출연하지 않았던 자신이 살아온 원칙을 고수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이 제안을 거절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발랑스와 실비아의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발랑스가 이 장면에서 TV 작품의 출연을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원칙을 고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현실에서의 실비아와의 로맨스도 거부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발랑스가 연극과 영화와 같은 허구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을 때 올리베이라는 순식간에 부인과 딸, 사위를 잃은 노배우의 일상을 조용히 따라가면서 ‘늙어감’에 관한 성찰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다소 유머를 곁들인 에피소드를 포함해서 동일한 카페에서 신문을 보면서 커피를 즐겨 마시고 길거리에서 자신의 팬들에게 친절하게 싸인을 해주거나 새 구두를 구입하고 집에서 피곤해서 잠을 청하기도 하는 배우가 아닌 평범한 노인으로서의 발랑스를 보여준다.

또한 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고 혼자가 되버린 손자 세르쥬의 학교를 찾아가 그를 집으로 데려오고 집에서는 그와 신나게 전자오락 게임을 즐기는 인정 많은 할아버지로서의 발랑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올리베이라는 나이가 든 발랑스에게 이러한 일상 속의 평온함도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음을 그가 귀가 도중에 마약 중독자를 만나 새 구두를 빼앗기는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올리베이라는 발랑스의 일상과 함께 회전목마를 포함한 놀이기구들과 에펠탑, 동상, 길거리의 아코디언 연주자 등 파리 시내의 낭만을 보여주는 낮과 밤의 아름다운 일상적인 풍경들을 보여주는데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파리는 활기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활기찬 풍경들의 이면에는 슬픔의 정조가 흐른다. 영화 속의 발랑스이자 현실의 피콜리이면서 동시에 올리베이라이기도 한 이 노인은 결코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없기에 이제 더 이상 그가 스쳐가는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다시 볼 수 없는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이미지 = 영화 '나는 집으로 간다' 스틸_출처_네이버영화

발랑스에게 손자 세르쥬와의 즐거운 시간들도 곧 추억이 될 것이다. 발랑스가 세르쥬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발랑스가 한편으로 세르쥬를 통해 과거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있는 듯한 인상도 받는다. 우리가 그러한 인상을 받는 이유는 발랑스가 늘 멀리서 창문을 통해 마치 과거를 들여다보듯이 세르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늘 등교하기 전에 샌드위치를 빼먹는,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한 손자의 모습을 볼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 노인은 알고 있는 듯 하다.

영화는 발랑스가 조르쥬의 제안으로 존 말코비치가 분한 미국의 영화감독인 존 크로포드가 연출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율리시즈’에 작은 역으로 출연하기로 결정하면서 절정을 맞는다. 발랑스는 ‘율리시즈’에서 벅 멀리건이라는 역을 맡는데 프랑스인인 그가 영어 대본을 외우고 연기를 준비할 시간은 겨우 3일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발랑스는 ‘율리시즈’의 촬영 도중 대사를 자꾸 까먹는 실수를 연발한다. 대사를 자꾸 잊어버리는 이유로 감독에게 지적을 받고 있던 발랑스는 갑자기 “나 집으로 가겠어. 피곤하군.”이라는 영화 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내뱉는다. 이 대사를 통해 지금까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경계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영화 속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완전히 무너진다. 이 장면에서 발랑스는 영화 ‘율리시즈’에서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벅 멀리건이 아닌 영화 밖의 현실에 존재하는 발랑스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장면은 올리베이라가 미셸 피콜리의 대사를 통해 그 자신의 노년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발랑스가 이 대사를 외치고 화면에서 나간 다음에 곧 바로 존 크로포드 감독의 “컷!”이라는 말과 함께 그가 크로포드의 뒤쪽에 있는 문 밖으로 걸어나가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이 장면은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절묘하게 무너뜨린다. 이 장면은 분명히 영화 ‘율리시즈’의 촬영 밖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데 올리베이라는 발랑스가 문 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세심한 조명 효과를 통해 마치 무대에서 쓸쓸히 퇴장하고 있는 배우의 모습처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현실의 장면도 방금 발랑스가 찍던 영화(허구)의 연장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 장면에 이어서 바로 등장하는 벅 멀리건이 부탁한 우유를 들고 영화 ‘율리시즈’의 무대 위에 등장해서 발랑스를 찾고 있는 연기를 하는 하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도 영화 속에서 현실로 돌아간 발랑스의 부재를 상기시키기 때문에 다시 한번 현실과 허구에 대한 경계짓기를 무화시킨다. 길거리로 나온 발랑스는 집으로 가는 길에 벅 멀리건의 차림으로 술집에 들어가 자신이 좀 전에 ‘율리시즈’에서 하던 대사를 반복한다. 이 장면에서도 역시 올리베이라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연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이러한 장면들의 연쇄를 통해 올리베이라는 이 작품에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이미지 = 영화 '나는 집으로 간다' 스틸_출처_네이버영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이 작품 속에서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탐구하던 올리베이라는 마지막까지도 섬세하게 영화를 매만지는데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쇼트에서 드러난다. 카메라는 세르쥬가 ‘율리시즈’의 촬영 현장에서 갑자기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와 삶에 지친 듯한 모습으로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고 있는 발랑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호기심에 가득찬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발랑스의 모습은 마치 실제로 연기를 마치고 무대 뒤로 쓸쓸히 퇴장하고 있는 노배우로서의 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조금 뒤에 세르쥬는 마치 자신도 어렴풋이 무언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듯이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시선을 조용히 아래로 떨군다. 올리베이라는 이 장면을 꽤 오랫동안 지속하면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때 찰나의 순간까지도 놓치지 않고 삶의 지혜를 건네주려는 노대가의 통찰력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우리가 조용히 멈춰 선 카메라 앞에 숨을 죽이고 세르쥬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갑자기 오프 사운드로 차 한 대가 ‘휙’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짧은 정적이 흐른 뒤에야 영화는 비로소 끝난다. 우리가 지각하기도 힘들 정도의 그 짧은 순간에도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올리베이라의 <나는 집으로 간다>의 마지막 장면은 필자로 하여금 묘하게도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2000)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 장면에서 어린 양양은 작고한 할머니에게 추도문을 읽으며 그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도 늙어간다고 말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올리베이라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손자의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시간은 그런 것이라고.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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